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부동 전투 (문단 편집) === 낙정리 전투 === [[파일:부대병력배치.png]] 8월 3일, 연대는 사단 명에 따라 낙상리에서부터 철수하여 사단 가장 북쪽인 낙정리 부근에 배치되었다. 사단은 12연대를 사단 예비대로서 배치하기로 하였으므로 연대장 [[김점곤]] 중령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낙정리 일대에서의 적을 격퇴하고 상황을 보아가면서 사단 집결지로 이동하겠다고 하였다. >1. 지형이 하천선 방어에 매우 유리하다. 따라서 이곳에서 기선을 제압하여 초전을 승리로 장식한다면 장병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복돋을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 >2. 이러한 유리한 조건 하에서 지연전을 포기하면 필연적으로 사단 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될 것이다. >---- > 12연대장 김점곤 중령 연대는 우선 제3대대로 하여금 적정을 탐지케 하고 제4중대와 81mm 박격포 12문과 기관총 8개반으로 구성한 부대로 막강한 포망을 만들었다. 이때 제9중대 정면에서는 피난민들 100여명이 건너오지 못하고 있음을 목격하였으나, 어찌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어 안타깝기만 하였다. 해가 저물고, 적은 선발대로 추정되는 부대를 보내어 낙동강에서 수심을 측정하여 도하지점을 탐색하고 있었으나 아군의 사격으로 이를 격퇴시켰다. 4일 06:00 안개가 걷히고 적 1개대대와 증원부대가 후속되는 것을 목격하자,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이를 보고하였으며 연대장은 적에게 포화를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대전차 중대와 제17야전포병대대 제2중대장과 긴밀한 협조 하에 57mm 대전차포를 낙정리 부근에서 발사하면서 다부동 전투의 첫 교전이 펼쳐졌다. 따라서 적은, 대응사격과 동시에 강을 도하하면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아군의 예광탄이 발사됨과 동시에 전 포화가 적에게 집중되면서 낙동강은 피로 물들었으며 강에는 오로지 적의 시체가 떠다니게 되었다. [[파일:낙정리의 첫 교전.png]] 이때 9중대 1소대장은 개인호에 있다가 올라오는 적을 야전삽으로 내리쳐 물리쳤는데, 수상히 생각하여 이를 확인하여 본 결과, 적이 아군의 사각지대로 이동하여 점차 몰려오고 있었다. 발견한 즉시 이들에게도 포화를 집중하여 무찌르고 포로 11명을 붙잡았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적은 사실상 패주하였고 개전 이래 처음 느껴보는 짜릿한 감정에 장병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적을 향해 우군기가 비행하여 적들을 향해 네이팜 탄을 쏟아부어 큰 피해를 주었는데, 이 광경을 보고 제11중대장이 "야, 낙동강에 오리알 떨어진다."라고 말한 데서 [[낙동강 오리알]]이란 관용어가 생겼다는 한 가지 설이 있지만 사실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강을 도하하려던 피난민들도 이 폭격을 맞아 다수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一. 적정 >적은 4일 미명을 기하여 약 1개대대 병력이 낙동강을 도하할 기도로 강변까지 진출 도하를 개시함 >二. 부대의 행동 >1. 아 연대 군단 경계부대로서 별지요도와 여히 방어태세 를 취하고 대기 중 3/8 17시 아 제3대대 진전에 적 전초부대가 접근하여옴을 확인 사격을 개시함 >2. 적은 4/8 미명을 기하여 약 1개대대 병력이 도하를 개시함으로 9시경에 이르러 우군항공기의 폭격과 야포대의 화력지원 하에서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이를 격퇴시킴 >3. 4/8 17시 현재 적을 완전 격퇴하고 상사의 명에 의하여 아 부대주력은 22시경 상림동에 철수함 >---- >제1사단 낙동강 양정리 지구 전투상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